영화 ‘덩케르크(Dunkirk)’는 1940년 5월 말,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서 벌어진 연합군 철수작전을 다룬 작품으로, 흔히 ‘기적의 철수’로 불립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지 영국군의 철수 이야기로만 이해되어선 안 됩니다. **유럽 전선의 시각에서 덩케르크 전투를 바라보면**, 이는 독일군의 초기 전격전이 가져온 전략적 대승과 유럽 전역의 판도가 급격히 전환되는 시점이었으며,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의 군사·정치적 입장이 얽힌 복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단순히 철수라는 한 장면을 넘어서 유럽 전선 전체에서 덩케르크 전투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그리고 각국의 시각에서 이 전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프랑스의 입장: 전선 붕괴와 내부 혼란 속의 저항
1940년 5월, 독일군은 '황색 작전(Fall Gelb)'이라 불리는 전략 아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우회한 뒤 아르덴 숲을 돌파해 프랑스 북부로 진격했습니다. 이 기습 작전은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의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켰고, 수십만 명의 병력이 북부 해안 덩케르크에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프랑스군은 당시 북부와 남부에서 동시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독일의 빠른 기동전(Blitzkrieg)에 의해 분단되어 통합 지휘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덩케르크 철수 당시 프랑스군은 단지 구조를 기다리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수만 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후방에서 저항전을 벌였으며**, 이들이 방어선을 지키는 동안 영국군과 일부 프랑스군이 바다를 건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나 대중 역사에서 프랑스의 이러한 희생은 거의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많은 프랑스 시민과 정치인들은 철수 작전 이후 영국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배신감을 가졌고, 이는 후속 전쟁 대응에 있어 프랑스 내부의 갈등과 비협조로 이어졌습니다. 유럽 전선의 시각에서 덩케르크는 단지 구조작전이 아니라, **프랑스군의 분투와 동시에 전선 붕괴의 상징**이었습니다. 결국 덩케르크 이후 프랑스는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독일에 항복했고, 유럽 대륙은 나치의 손에 넘어가게 되며 전쟁의 주도권이 완전히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시각: 기적의 철수와 정신적 승리의 신화화
영국에게 덩케르크 전투는 군사적 패배였지만, 정치적·심리적으로는 **승리의 서사**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덩케르크 철수를 '기적'이라 표현하며 국민들에게 강한 결속력을 불어넣었고, 이는 곧 ‘덩케르크 정신(Dunkirk Spirit)’이라는 사회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영국군은 덩케르크에서 약 33만 명의 병력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 중 민간 선박 수백 척이 동원된 점은 국민의 참여를 상징하는 주요 요소로 강조됐습니다. 이는 전후 영국 사회에 ‘우리는 함께 싸웠다’는 국민적 자긍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전쟁의 주도권을 유럽 대륙에서 영국 본토로 이동시키는 심리적 전환점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철수 과정에서 **장비 대부분을 현장에 남기고 후퇴**했으며, 이는 이후 본토 방어에서 심각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프랑스군을 모두 구조하지 못한 책임에 대해 내부적으로도 비판이 있었지만,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 부분은 대중적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그레이하운드’와 같은 미국 중심 전쟁영화와는 달리, ‘덩케르크’는 영국인의 시선에서 전쟁의 혼란과 생존의 필연성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영국 정부의 선전전과 국내 여론 통제가 병행되었다는 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결국 영국에게 덩케르크는 ‘퇴각의 미학’이자, 후속 전쟁 준비를 위한 **사기 회복의 출발점**이었으며, 이 전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달라진 상징이 되었습니다.
유럽 전선 전체에서의 의미: 전략적 대실패이자 전쟁의 재편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결과적으로 연합군의 **전략적 후퇴**를 의미하며, 유럽 전선 전체에서의 대패배로 평가됩니다. 영국은 병력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지만, 유럽 대륙에서의 군사적 기반을 상실했고, 프랑스는 철수 이후 불과 3주 만에 독일에 항복했으며, 벨기에는 이미 함락된 상태였습니다. 이로써 유럽 전선은 완전히 나치 독일의 손에 넘어갔고, 히틀러는 서유럽 대부분을 장악하게 됩니다. 유럽의 입장에서 덩케르크는 **군사적 질서가 붕괴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자, 전쟁 초반 연합군 전략의 치명적인 실패를 의미합니다. 독일군은 당시 해안까지 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괴링의 루프트바페에게 철수 병력 공습을 맡기면서 지상군 투입을 지연시켰고, 이 틈을 타 수십만 명이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히틀러의 최대 실수 중 하나로 꼽으며, 덩케르크 철수가 가능했던 것도 결국 독일 측의 자만과 전략적 착오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습니다. 나치 독일은 이후 이 승리를 과대 선전했고, 점령지를 기반으로 자원을 약탈하며 전쟁을 확장했으나, 연합군은 그 틈에 전열을 가다듬고 결국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유럽에 재진입하게 됩니다. 따라서 덩케르크는 단기적으로는 연합군의 후퇴이자 유럽의 절망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전쟁의 흐름을 반전시킬 준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유럽 전선 전체에서 본다면, 이 전투는 패배와 승리의 경계에 서 있는 역사적 분기점이자, 전쟁의 전략적 구도를 결정지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럽 전선 시각에서 본 덩케르크 전투'는 단지 철수라는 결과를 넘어, 유럽 각국이 이 전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각국의 이해관계와 역사 인식 속에서 다양한 해석을 낳았으며, 단일한 영웅 서사가 아닌 복합적인 역사 현실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